닫기

이럴땐 이렇게


상황별 자녀지도 노하우

[경제]  고학의 추억

손길선칼럼

2

427

2018.10.14 20:39

요즘들은 '고학'이라는 말 대신에

그저 아르바이트라고 하고

그도 줄여 '알바'라고 말하지만

너도나도 하는 그 알바생과는 조금 다른 고학생이던 때가 있었다.

 

처음에 하게 된 알바는 여름 방학 때 우리 집 호박밭에서 잘 익은 호박 여남은 덩이를 들고 나가

시장통 한 모퉁이에 펼쳐놓고 앉아 팔아보는 일이었다.

​들고서 나갈 때는 무겁던 것들이 하나 둘 팔려 나가면 반갑기도 했으나

고것들, 반짝반짝하고 통통한 것들과의 이별이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그것도 나름 돈벌이라고 싸게 달라는 손님과 조금 실랑이도 하고

길바닥에서 한나절 보내는 동안 아는 친구라도 만날까 부끄럽기도 했지만

다 팔아서 번 돈으로 엄마와 함께 밀가루 한 포대를 사서 돌아올 때는

그만큼의 뿌듯함이 있었다.


부모가 아픈데 딸자식에게 뭐 하러 공부를 시키느냐고

동네 사람들이 수근 거렸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슨 다른 도리가 생기기를 나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모 신문사의 주간지를 떼다 파는 일이었는데

30여 년 전쯤에 학생용 오버코트를 입고 마스크로 얼굴까지 가린 채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지하도 입구나

성인들이 드나드는 다방 같은 곳에 들어와서

조심스럽게 주간지 500”이라고 말 해 놓고 무연하게 서 있는

어린 여학생을 보셨다면

그 중에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왜 그리도

형제들 육성회비와 등록금 납기가 자주 돌아오는지

공중전화 박스 같은 곳에 혹시 사람들이 실수로

돈을 떨어뜨리고 가지는 않았을까 하고

지나칠 때마다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었다.


그래도 고정적인 수입이 되는 일은 학생을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학교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중3 겨울방학부터는 초등학생들에게

숙제며 모르는 공부를 봐주는 일을 했다.


내가 받아본 사교육이라고는

네 살 위의 언니 교과서를 틈틈이 앞질러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사교육 시장의 수혜자라면 수혜자로 거듭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도의 저 유명한 <7.30 교육개혁조치>

족집게 과외와 몰래바이트를 성업시키는 대신에

피라미도 못되는 플랑크톤의 고학까지 금지시킴으로써

나와 같은 미생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진로수정이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후략하고...

 

 

 
  지금도 학업을 하며 알바를 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다.

  물론 알바를 하는 이유가 예전과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대다수 어리거나 젊은 우리의 자녀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다.

 

​  또한 정규직에서 밀려났거나

  한시적으로 일거리를 찾아야하는 많은 성인들까지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나서고 있는 현실이다.


 

국가에서 정한 최저 임금이나 최저 시급에 대해 이견이 많고 각자의 입장이 다를 줄 알지만

어려운 사람들끼리의 대립이라는 결과를 들을 때는 마음이 너무 아프다.

피차 다 서로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이라면 큰 틀에서 공생의 묘책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또한 우리네 삶이란 게 늘 그랬듯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의 또 다른 버전으로

'법 또한 사람의 일'이라

서로 간에 "대로" 만을 외것이 아니라

법이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빈틈을

사람의 인정과 역지사지의 지혜가 메워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군사정권의 서슬이 퍼런 가운데에도

불.법.적.으로

과외를 주선해 주시고

등록금을 선불해 주시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신 어른들이 계셨다.

 

그 분들 덕분에 입주 가정교사로 겨우겨우 학업을 이어가던 알바생이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번듯한 직업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너무 늦은 감사가 송구할 따름이다.

 

 



  

 

 

 

 

 

twitter facebook google+
댓글 2
서비스 바로가기